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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가스 기획기사] 그들의 성공 공식은 ‘편견과 차별’의 ‘승화’에 있다. - LV 한국계 수장들


그들의 성공 공식은 ‘편견과 차별’의 ‘승화’에 있다.


라스베이거스의 다양성이 일궈낸 한국계 수장들

법조계와 스포츠계 등 남성 우월 분야에서 두각 나타내


지난 2월 CNBC에서는 라스베이거스 풋볼팀인 레이더스의 대표 샌드라 더글라스 모건에 대해 조명했다. 최초의 여성으로서 그리고 아시안계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인물로서 입지전적인 시점에서 그의 스토리를 다루었다.

라스베이거스는 거대한 규모의 공군 기지를 보유한 환경으로 인해 미군과 아시안계의 가족들이 적지 않다. 이 중 올드 타이머에 속하는 군인 자녀들은 상당수가 편견과 고통 속에 성장 과정을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인물이 된 사례가 라스베이거스에는 존재한다.


워낙 다양성을 지닌 이 도시는 차별의 벽을 뚫고 올라온 능력자들에 대해 그 다양한 경험과 의지를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최근 여러 명의 한국계 전문인들이 그 분야의 수장으로 임명되는 역사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 스토리를 따라가 본다.



 


샌드라 모건(Sandra Douglas Morgan)

레이더스 대표


“샌드라 모건, 그녀는 역사를 만드는 것을 꿈도 꾸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자신과 부모님을 자랑스럽게 만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주류 언론인CNBC는 라스베이거스 레이더스 풋볼 팀의 수장인 샌드라 모건을 차별적 환경을 뚫고 일어선 여성으로서 크게 다루었다.

흑인 아버지 길버트와 한국 어머니 차길 씨 사이에서 태어난 모건 사장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고, 영어가 서툰 어머니가 카지노 딜러로 일하던 시절 수많은 차별 대우 받는 것을 가슴에 두고 자랐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내가 무엇을 하든 평등과 존중을 옹호하는 일을 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그러한 그녀의 정의로운 꿈이 법조인을 거쳐 리그 역사상 NFL 팀을 이끄는 최초의 한국계 흑인 여성 대표로 이루어졌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성장한 모건 사장은 2003년 UNLV의 윌리엄 S 보이드 법대를 졸업하고, 미라지 카지노 리조트의 소송 변호사로 법조계에 발을 디뎠다. 이어 2008년 노스 라이베이거스시의 최초 흑인 검사로 부임했고, 2019년 네바다주 게임관리위원회에서 최초의 유색인종 의장에 부임했다. 이후 라스베이거스 슈퍼볼 개최위원회 부의장을 맡으며 레이더스 구단과 인연을 맺었다. 과거 미네소타 바이킹스와 시카고 카디널스에서 뛰었던 와이드 리시버 돈 모건이 그의 남편이어서 그녀의 풋볼과의 인연은 매우 깊었다.

2021년 레이더스의 구단주 마크 데이비스와 만나면서 그녀의 삶은 큰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레이더스 팀 사장으로 오퍼를 받은 것이다. 결국 작년 7월 그녀는 NFL 레이더스 팀의 최초 여성 사장이 되었다. 모건 사장은 취임식에서 “구단의 약속과 미래를 믿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팀에 의미 있는 공헌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1인자로 성공했다는 도식적인 의미보다, 가정 환경과 사회 의식의 편견을 딛고 그 에너지를 자신의 성공 공식에 대입했다는 것. 모건 사장은 “저에게 있어 성공의 정의는 첫 번째가 아니라 내 뒤를 이어 진정한 리더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차세대 리더를 지원하고 배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남성 지배구조의 산업이 모두에게 개방된 8차선 고속도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강조했다.




패트리샤 리(Patricia Lee) 대법관


“아버지가 흑인이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난 한국에서는 못마땅한 일로 여겨졌고, ‘혼혈’이란 비난을 받았다.” 네바다주 법관인선위원회에 제출된 대법관 후보자 답변서에 패트리샤 리는 이렇게 적었다. 시슬락 전 주지사는 “그가 지닌 능력의 폭과 깊이, 그리고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경험”을 대관법 임용 이유로 꼽았다.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두었던 리 대법관은 만 7세 때 부모가 이혼을 하고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가 집을 떠났으며, 그 후로 자신이 어머니와 두 남동생을 이끌며 힘겨운 삶을 헤져나가야만 했다고 회고한다.


어머니의 새 반려자에게 심한 학대를 당한 그녀는 15세 때 가출해 친구들 집을 전전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전교 학생회장과 응원단장을 맡았으며 전교 최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후 USC에서 심리학과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했고, 조지워싱턴대에서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했다. 변호사가 된 리 대법관은 전문 송무 분야인 복잡한 상업소송을 주로 담당했고, 특허법과 가족법 소송도 맡았다.

작년 9월 애버 실버 전 대법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그녀는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역경을 계기로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으며 아직도 그 결심을 잊지 않고 있다.”고 술회했다.




마리아 갈(Maria Gall) 판사


“팬데믹 이후 불이익을 당하거나 공격의 대상이 되어버린 아시안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왜곡된 인식 속에서 피해를 당하는 약자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공정하게 일하고 싶습니다.” 마리아 판사는 마이너리티의 아픔을 공유할 줄 아는 진정성을 지녔다.


역시 군인인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교적 안정된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켄터키 대학 로스쿨을 우등으로 졸업했고, 정치학 석사까지 마쳤다. 뉴욕에서 변호사 업무를 시작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켄터키 대학에서 조교수로 국제 인권법을 강의했다. 이후 2019년 라스베이거스 대형 로펌에서 상법 소송을 전담하게 되었고, 인종 평등 및 다양성 이니셔티브 운영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이력을 인정받아 작년 6월 네바다주 클라크 카운티의 제8 사법 지방 법원에 판사로 임용되었다.


마리아 판사는 자신이 한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녀는 “한인들의 권익을 대변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인종, 불이익에 노출된 여성들을 위한 공정한 판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절실했던 판사 도전기를 피력했다.

마리아 판사는 1,5000 달러 이상의 민사 소송에 관여하게 되고, 교통 사고, 의료 사고, 고용인을 위한 노동법, 재산법 등의 판결을 맡고 있다.



글_ 제이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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